커리어의 정점을 향해 발돋움하려던 찰나, 과감히 은퇴를 선언한 김다현 작가. 그가 선택한 대안적 삶의 명제는 뚜렷하다. 바로 ‘나’로 살기 위한 실천적 움직임을 멈추지 말 것. 그리고 비로소 쉽게 예측 가능했던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쁨과 성취를 얻었다.
김다현 작가는 남들이 한창 일할 나이라고 하는 ‘마흔’에 남편과 함께 은퇴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2021년에는 은퇴 계획과 경험담을 담은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라는 에세이도 써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은퇴를 위해 모은 돈이 얼마인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은퇴 생활을 해보니 안정적인 생활의 대안으로 선택한 삶에서 꼭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남은 시간을 채워줄 나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 김다현 작가가 찾은 대안적 삶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Q. 현재 부산에서 지낸다고 들었는데,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요?
아침에 수영 갔다가 돌아와서 점심 먹고, 오후 시간에는 취미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요즘 남편과 저는 뭔가를 많이 배우거든요.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요. 오후는 그렇게 보내다 저녁 먹고 산책하고 밤에 넷플릭스 한 편 보고 잠들고. 거의 이런 패턴으로 지내고 있어요.
Q. 에세이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는 출간 당시 파이어족 트렌드와 맞물려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마흔’이라는, 한창 커리어를 쌓을 시점에 경제활동을 멈추고 ‘은퇴’를 선택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은퇴를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팀장이 되기 전까지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근데 어느정도 연차가 쌓이니까 회사에서 실무만 하기보다는 팀을 이끌어주기를 원하더라고요. 팀장의 역할에 대한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전과 달리 일이 재미없고, 예전에 좋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일들도 생각나더라고요. 여행을 다닌다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들이요. 남편도 힘들어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가 지금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요. 매일 써온 가계부를 펼쳐놓고 일상생활에 쓰는 비용을 계산해보니까 둘 다 물욕이 없어서인지 충동적인 지출을 빼면 돈은 안 벌어도 될 것 같았어요. 둘이 가지고 있는 돈을 연금 받을 때까지 아껴서 쓰면 살겠더라고요. 일단 일을 안 한다고 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 싶어서 그만뒀어요. ‘새로운 기회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돈을 벌 수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지는 말자’ 정도로 생각했어요.
Q. 처음에는 가족들도 은퇴를 말리고, 주변에서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고요. 그럴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렵지는 않았나요?
두렵기보다는 어떻게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저희는 은퇴하기 5년 전부터 미리 양가 부모님들께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다. 우리만의 은퇴 계획이 있고, 만약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서 돈이 부족해지면 그때는 다시 일하면 된다”고요. 다행히 저희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분들은 아니셔서 설득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Q. 아무래도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하면 여러 상황이 바뀌잖아요. 은퇴 전후로 달라진 것들은 무엇인가요?
생각보다 세상에는 ‘소속’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여행 갈 때 출입국 심사서에도 직업을 써야 하고, 은행 계좌 만들 때, 카드 만들 때, 설문조사 할 때도 직업과 소득을 써야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소속을 적으면서 당당했는데, ‘무직’이라고 적으면서 마음이 조금 이상했어요.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 것 같아요.
Q. 은퇴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과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일단 현재 우리가 가진 재산은 얼마인지, 어떤 패턴으로 돈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은퇴 후에도 돈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계산해보고 계획을 세웠어요. 그 계획대로 몇 달을 살아보고 나서 은퇴를 해도 괜찮겠다고 확신했죠.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후에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뭔가 변화가 필요한가?’ 같은 것들을 생각했어요.
Q. 은퇴 이후의 삶은 예상한 대로 흘러갔나요,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나요?
크게 보면 생각했던 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예상보다 조금씩 지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은퇴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투자 수익이 생겨서 괜찮아요. 만약 지출이 좀 많으면 그다음 달에는 좀 아껴서 쓰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경제 사정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계속 계획을 변경하고, 시뮬레이션도 해봐요.
Q.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은퇴 생활 자체가 큰 내공이 될 것 같아요. 은퇴 생활을 하면서 얻은 통찰이나 배움이 있나요?
저는 되게 열심히 일하는 편이었어요. 미리 준비하고, 널브러져 있는 시간을 불안해할 정도로 계속 움직여야 하는 계획형 인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저를 아는 모든 사람이 “넌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분명히 얼마 못 견디고 다시 일하게 될 거야” 했어요. 근데 막상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보니까 정말 좋은 거예요. 제가 생각보다 여유 있게 사는 걸 잘하더라고요. 그리고 인생이나 가치관을 돌아보게 됐어요. 요즘에는 ‘주변이랑 비교 안 하고 나만 만족하면 특별히 힘들 게 없구나’ 같은 생각을 자주 해요. 어차피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건 나밖에 없는데, 나만이라도 내 뜻대로 살아가면 충분히 행복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Q. 지금까지의 은퇴 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 또는 가장 기억에 남거나 특별한 일은 무엇인가요?
작년에 남편이랑 친정엄마랑 유럽에서 세 달 정도 살다가 왔어요. 그때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살았는데, 이왕 온 김에 유명한 빈 필하모닉이 공연을 한번 보자 싶었어요. 그런데 티켓이 너무 빨리 매진되더라고요. 결국 입석표를 5유로에 사서 공연을 봤어요.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굉장히 좋았어요.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듣고, 바이올린도 연주하고 싶어서 배우고 있어요. 이때 깨달은 점은 자신의 호기심을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고 싶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는 거예요. 저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데, 회사 다닐 때는 지쳐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배움을 경험하는 데에 그렇게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어요. 바이올린을 부산의 부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배우는데, 한 학기 동안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배우는 비용이 20만 원이에요. 바이올린은 중고 마켓에서 7만 원 주고 샀어요. 국민체육센터에서 배우는 수영 강습료도 주 5회에 6만 원이에요. 2만 원이면 부산시립교양악단의 공연도 즐길 수 있고, 8000원이면 부산 영화의전당 라이브러리에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공부할 수도 있어요. 우리나라는 문화 인프라가 되게 잘돼 있는 나라더라고요. 많은 돈 안 들이고도 놀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고, 잘 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Q. 두 분은 세계여행을 꿈꿀 만큼 여행에 진심이죠. 요즘도 자주 여행을 다니나요?
코로나19가 끝나고는 매년 해외로 나갔어요. 터키와 그리스에서 세 달, 유럽에서 세 달 동안 지내다 왔어요. 시간적 여유도 많고, 비싼 비행기 타고 가는데 금방 들어오면 아쉬우니까 한 번 여행을 가면 좀 길게 있다가 와요. 한 나라에 오래 머물면서 문화 차이를 느끼는 게 재밌더라고요. ‘저 나라 사람들은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관찰도 하고요.
Q. 치열했지만 안정적인 작장 생활을 과감하게 접고 대안으로 선택한 이른 은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은퇴 후에 비로소 회사 이외의 세상을 알게 되었어요. 회사 밖에 다양한 세상이 있는데 모르고 살았구나 싶더라고요. 여행도 길게 가니까 그 나라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게 되고요. 또 뜻하지 않게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러 다니면서 전혀 접점이 없던 출판사 관계자도 만나고, <주부생활> 같은 매체의 기자들도 만나고, <유퀴즈>에 출연해서 연예인도 만나게 되는 경험이 신기했어요.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은퇴했으니 물건은 안 사더라도 경험은 아끼지 않고 누리려고 해요.
Q. 지금까지의 은퇴 생활은 만족도가 높다고 느껴져요. 그렇다면 반대로 고민이나 아쉬운 점도 있나요?
저희가 또래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보니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만나기 어려워요. 저와 남편이 브런치에 은퇴 관련 글을 쓰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서 이른 은퇴 생활을 하는 분들과 댓글로 소통하다가 친해지게 되었어요. 얼마 전 그분들과 잠깐 만나서 은퇴 경험을 얘기하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 중에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제게 궁금해하던 건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였어요. 근데 저희는 돈이 많아서 은퇴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돈보다는 은퇴 후의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잘 살지 고민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은퇴하고 나서 놀 거 다 놀았더니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며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이 봤거든요. 은퇴한 사람에게는 규칙적인 루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너무 늘어져 있으면 왠지 우울하거든요. 저와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낮 동안에 공부하고, 저녁 때 산책하는 루틴을 이어가고 있어요. 루틴 안에서 가끔 소소한 일탈도 해요. 그래야 노는 것도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은퇴 후 주변의 시선에 조금 힘들 수도 있어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만의 루틴을 찾으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주변이랑 비교 안 하고 나만 만족하면 특별히 힘들 게 없구나’ 같은 생각을 자주 해요. 어차피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건 나밖에 없는데, 나만이라도 내 뜻대로 살아가면 충분히 행복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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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한별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