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조성호 카이스트 실패연구소 소장
도전에는 실패가 따른다는 걸 잘 알면서도, 한국은 여전히 마음껏 실패하기 어려운 사회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는 실패를 바라보는 인식을 재정립한다. 조성호 소장은 실패를 딛고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 힘은 결국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2021년,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님의 제안으로 실패연구소가 시작되었다고요. 실패연구소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나요?
카이스트는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이에요. 그동안 연구와 기술 개발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며 수준도 높아졌죠. 그럼에도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어요. 새로운 도전과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은 문제를 탐구하는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연구가 필요해요. 하지만 국내 연구 환경은 그렇지 못하죠.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에서도 연구에 실패하면 연구비를 삭감하고, 다음 연구 과제 선정에 불리해지다 보니 연구자들 역시 결과를 ‘성공’ 중심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 성과를 내려면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지만, 학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아직 그런 문화가 아니에요.
한국 사회는 왜 실패에 관대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뤘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와 실패를 최소화하면서 ‘빨리빨리’ 성과를 내는 방식이 사회 전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어요. 실패를 안 하려면 이미 우리가 정한 목표를 달성한 국가와 기업의 사례를 따라 하는, 일종의 정답지가 있는 ‘패스트 팔로’ 전략으로 전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성공 방식에 지나치게 매몰됐다는 점이에요. 기성세대가 경험한 성공 방식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는 실패와 시행착오,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성공하는 문화가 굳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선 지금은 누구도 하지 않은 것을 먼저 시도해야 하는 단계죠. 이런 시점에서 변화를 하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연구와 시도를 장려하는 새로운 학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실패연구소가 설립됐죠.
무슨 계기로 실패연구소를 맡게 되었나요?
저는 실패 전문가는 아니에요. 공학자이자 공학 박사죠. 초대 소장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면서 제가 두 번째 소장을 맡게 됐어요. 총장님께서 “연구소장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교수로서 제가 오랫동안 품어온 교육관과 깊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평소 교육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카이스트가 연구기관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에요. 엄연히 학교죠. 학교는 교육이 가장 중요해요. 교수로서 20여 년 동안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어요. 저 역시 학생이었고,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교수가 됐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교육 시스템을 경험했어요.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세계 최고 공과대학의 교육과 연구 과정도 직접 경험해봤죠. 기술적인 역량만 놓고 보면 MIT는 분명 뛰어난 곳이지만, 그 경험을 통해 오히려 ‘좋은 교육기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어떤 안타까움을 느꼈나요?
초·중·고 시절에는 인성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대학에 와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배우며 사회에서 필요한 경쟁력을 갖춰 세상에 나가는 것이 이상적인 교육의 흐름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은 입시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왜 대학에 왔는지’ ‘정말 원하는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학생이 많아요. 풍요로운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젊은 세대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자기 가치관과 생각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특히 카이스트처럼 특화된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기술 교육과 전문 지식 습득에만 매몰된 경우가 많아요. 늦었지만 대학에서라도 온전한 가치관을 갖추도록 돕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술 역량은 뛰어나고 똑똑하지만 그에 걸맞은 인성과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인재는 사회에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기술 역량보다 정신 역량 교육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군요.
그렇죠. 교육을 크게 정신 역량 교육과 전문 지식 역량 교육으로 나눈다면, 카이스트는 후자에는 굉장히 뛰어나지만 정신 역량 교육 측면에선 아쉬워요. 그걸 MIT에서도 경험했죠. MIT에서는 기술 역량 교육은 정말 철저하게 이루어지지만 학생이 불행한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아요.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하죠. 카이스트가 학생들을 조금 더 돌보고, 교육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더 좋은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이런 문제의식이 실패연구소와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실패연구소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실패연구소의 표면적인 취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지만, 그 기저에는 더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같은 자기 삶에 대한 목표 의식이죠. 같은 실패를 경험해도 누군가는 크게 무너지고, 누군가는 배움으로 삼는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돼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에는 정답지가 없어요. 그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하나씩 배워나가는 것이죠. 실패를 하지 않고는 성공할 방법이 없어요.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으로 실패 경험을 공유하는 ‘실패학회: 망한 과제 자랑대회’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역량을 키우려면 가장 먼저 내 실패를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에서 실패한 순간들을 담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망한 과제 자랑대회’를 연 이유도 실패를 말할 수 있는 장치를 단계적으로 만든 거였죠. 사실 자신의 실패담을 남에게 얘기한다는 건 우리나라 정서상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회복탄력성을 얻으려면 아주 유치한 실패담이라도 용기 내서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들을 지난 3년간 실패연구소를 통해 해왔죠.
한국 사회가 여전히 실패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란 생각이 들어요.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상 불리하게 작용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죠. 실패를 얘기하면 인사고과에서 점수를 깎이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충분한 동기와 비전을 지닌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목표를 이뤄가는 사례가 쌓일수록 국민과 사회의 인식도 조금씩 바뀔 것이라 생각해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과정이겠지만요.

학내에서 ‘카이스트 실패주간’을 3년째 운영하면서 생긴 변화가 있나요?
2년에 한 번씩 ‘실패 인식 조사’를 하고 있어요. 웃긴 이야기이기도 한데, 카이스트도 정부 조직이다 보니 성과를 수치로 증명해야 하거든요. 지금까지 두 번 했는데 꾸준히 하다 보면 변화가 그래프로 나타나겠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숫자로 보여주긴 어렵지만 이전에 비해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개선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흥미로운 건, 이 조사를 전 국민 대상으로 확장했을 때 나타난 결과였어요. 오히려 어른 세대가 실패와 도전을 덜 두려워하고, 젊은 세대일수록 안정성을 추구하더라고요. 보통은 젊을수록 도전적일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결과는 반대였죠.
요즘 세대는 실패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망한 것 같은 감정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른 세대는 한국 사회의 고도성장기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노력하면 삶이 바뀌는 경험을 해왔죠. 반면 젊은 세대는 이미 충분히 성장한 사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노력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재미있는 건,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도전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는 점이에요. 머리로는 다 알지만 현실에서는 주저하죠.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더 커요.
새해를 맞아 ‘이제는 뭔가 바꿔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나이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빠른 시기예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존재죠. 한국 사회는 아직 많은 사람이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유명해지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다는 욕구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것이 삶의 최종 목표가 되면 실패는 더 두렵고 과정은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같은 일을 해도 왜 하느냐에 따라 경험은 완전히 달라져요. 진짜 하고 싶은 일, 스스로 의미를 느끼는 목표가 있을수록 실패는 배움과 버틸 힘이 되죠. 반대로 목표가 불분명하면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고요.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합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려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질수록, 실패를 감당하는 힘도 함께 커진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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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희성
Photographer 김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