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품은 맛
요즘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정성껏 잘 만든 음식, 단순하지만 기억에 남는 맛을 찾는다. 조서형 셰프의 요리에는 계절과 추억이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담겨 있다.
‘미식’이라는 단어는 종종 비싸고 특별한 식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조서형 셰프(@seohy2ong)에게 미식은 일상적인 감각에 가깝다. 식탁 위의 반찬 한 가지, 제철 식재료 하나에서 기억과 계절이 겹쳐지는 순간들. 한식 주점 ‘을지로 보석’을 시작으로 ‘남영동 경주’, 반찬 브랜드 ‘새벽종’, ‘여의도 요정’까지. 조서형 셰프는 공간과 식재료, 메뉴와 감각을 다층적으로 풀어내며 한식의 미묘한 결을 담백하게 드러낸다.
최근 론칭한 ‘새벽종’은 어떤 브랜드인가요?
새벽종이라는 이름은 ‘효종갱’에서 가져왔어요. 갈비, 닭, 해삼, 전복 등을 밤새 푹 고아 새벽 종이 울릴 무렵 먹는 보양국인 효종갱에서 착안해 ‘새벽에 종이 울릴 때 먹는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담았죠. 새벽종의 반찬은 일반 반찬 가게에서 보기 드문, 셰프로서의 터치가 들어간 요리성 반찬에 가까워요.
“새벽종을 통해 반찬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고 한 말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저는 한식이 우리나라에서만 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에서는 열광하는 김밥이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1만 원도 비싸다고 하면서 후토마키에는 2만5000원도 부담 없이 지불하는 분위기잖아요. 그런데 사실 김밥이 손이 더 많이 가거든요. 그런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어요. 반찬이나 한식 자체의 값어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저는 지금 한식이 너무 양분화되어 있다고 느껴요. 파인다이닝이거나 백반이거나. 저희는 그 사이의 중간 가격대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브랜드가 되어보고 싶어요.
반찬을 ‘선물할 수 있는 미식’으로 만들기 위해 디자인과 패키지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들었어요. 혹시 이전에 패션을 했던 경험이 영향을 줬을까요?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예전부터 유행을 따르는 소비보다는 사람들이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요즘은 ‘어디가 좋다더라’ 하면 관심이 빠르게 옮겨가잖아요. 저도 그런 흐름을 자주 봐왔기 때문에 반찬도 자극적인 맛으로 반짝 관심을 끌기보다 사람들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새벽종의 인스타그램이나 비주얼 톤도 최대한 단정하고 절제된 방향으로 잡고 있어요. 을지로 보석은 계절감이 뚜렷한 술집이다 보니 더울 때는 시원한 음식, 추울 때는 뜨거운 음식처럼 강한 자극을 주는 사진을 올리는 편이고요.
요즘 직접 반찬을 만들어 먹는 사람이 줄었죠. 다시 반찬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식재료나 반찬에 얽힌 추억, 또는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여름마다 엄마가 자주 해주던 반찬이라든지, 할머니가 묵은지를 씻어서 정성스럽게 만들어주던 음식처럼요. 그런데 요즘은 엄마 세대도 요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자연스럽게 그런 추억 자체가 줄어들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반찬을 만들 때도 단순히 ‘지금 이 채소가 제철이니까’가 아니라 ‘여름에 가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 ‘여름방학에 할머니 댁에 가면 났던 냄새’ 같은 기억의 조각들을 반찬 메뉴에 담으려고 해요. 그렇게 음식과 기억을 연결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벽종의 반찬 중 추천하고 싶은 메뉴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저희 매장은 일반 반찬 가게와는 달리 메뉴 구성이 자주 바뀌는 편이에요. 그중에서도 시그너처 메뉴를 꼽자면 ‘소스 시리즈’를 들 수 있어요. 제가 요리할 때 이런 소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개발한 것들이에요. 매장에서뿐 아니라 스마트스토어를 통해서도 구매할 수 있어요. 지금은 ‘새벽종 양념장 세트’를 선보이고 있어요. 여름에 제철인 호박잎이나 채소와 곁들일 수 있는 쌈장, 냉채에 잘 어울리는 겨자 소스 등으로 구성된 이 라인은 3주에 한 번씩 바뀌어요. 계절 미식 메뉴로는 병어조림이나 병어찌개, 여름 입맛 살려주는 냉채류가 반응이 좋고요.
지금도 직접 장을 보러 다닌다고 들었어요.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재료나 뜻밖의 발견이 있다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재료는 ‘모자반’이에요. 제주도에서는 ‘몸’이라고 불리는 해조류인데, 저는 줄기가 가늘고 긴 형태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주로 몸국에 쓰이니까요. 그런데 직접 시장을 다니다 보니 남해나 다른 지역에서 나는 모자반은 생김새가 아예 다르더라고요. 어떤 건 냉국에 쓰이기도 하고, 김치를 담가 먹는 지역도 있고요. 해조류도 미역처럼 물살이나 환경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는 걸 이번에 처음 체감했어요.
을지로 보석의 시그너처인 ‘들기름 낙지젓 카펠리니’처럼 의외의 재료 조합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인상 깊어요.
메뉴를 짤 때 ‘내가 지금 먹고 싶은 게 뭐지?’를 먼저 생각해요. 예전엔 식빵에 생참치랑 고깃집에서 내오는 달달한 주황색 쌈장을 얹어 먹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색다른 조합에 꽤 민감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맛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낯선 재료를 쓸 때도 어떻게 하면 익숙한 맛과 연결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요. 들기름 낙지젓 카펠리니도 사실은 간장비빔국수에 낙지젓을 얹어 먹다 나온 조합이에요. 한참 먹다가 살짝 물릴 때쯤 냉장고에 있던 깻잎장아찌를 곁들였는데, 그 조화가 의외로 훌륭하더라고요. 그렇게 스스로 발견한 것들을 메뉴로 만들어요.
채소의 질감까지 고려해서 직원들에게 조리법을 교육한다고 했는데, 그만큼 ‘재료’에 집중하는 이유는 뭔가요?
5년 가까이 하루도 안 빠지고 직접 장을 봤어요. 그때 깨달은 건, 똑같은 채소도 때에 따라 질감이나 수분감이 다르다는 거였어요. 특히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더 뚜렷해요. 무더위엔 열무가 질겨지고,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대가 굵어져요. 더위에 시든 열무는 초장이나 된장으로 새콤달콤하게 무치고, 굵어진 열무는 살짝 데쳐 겉절이로 만들어요. 이렇게 계절에 맞춰 요리를 하면 손님들도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리는 반찬”이라고 좋아해주세요. 저는 사람들이 뭘 먹고 싶어 하는지 늘 관찰하고 그 계절에 딱 맞는 메뉴를 선보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맛’을 느끼는 방식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즘 미식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요즘 ‘미식’은 경험으로 확장되는 것 같아요. 음식을 먹는 공간이 전하고자 하는 분위기나 메시지 등도 중요해졌다고 느껴요. 전엔 테마가 있는 술집이나 주막 같은 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었던 ‘감성’이 이제는 미식의 한 요소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거죠. 일본식 이자카야에 가면 정말 일본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고, 중식당들은 중국 현지에 온 듯한 분위기까지 연출하잖아요. 그만큼 이제는 ‘무엇을 먹었는지’보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훨씬 중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게 쓰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게 요즘 사람들이 찾는 미식이 아닐까 싶어요.
한식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미식’이라는 감각에서 조금 비껴간다는 느낌도 있어요. 한식만의 미식적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한식의 미식적 특징은 단연 사계절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 음식은 언제 먹어도 비슷하잖아요. 하지만 한식은 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봄이면 냉이된장찌개, 여름엔 삼계탕, 가을엔 콩밥에 제철 나물, 겨울에는 전골이나 군고구마처럼 당연한 듯 계절이 음식에 따라붙어요. 또 하나는 추억이 담겨 있다는 점이에요. 여름방학에 외할머니 댁에서 먹던 옥수수나 콩국수, 겨울에 난로 옆에서 구워 먹던 쑥개떡 같은 것들. 그 계절의 공기, 풍경, 감정까지 모두 담겨 있는 음식이 한식이죠.
여름에는 유독 입맛이 없고, 밥 한 끼 차리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곤 해요. 이런 계절에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음식을 즐기는지 소개해주세요.
무더운 여름에는 잘 안 차려 먹어요. 더위를 워낙 많이 타서 불 쓰는 것도 싫고 입맛도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건, 냉장고에서 꺼낸 보리차에 식은 밥 말아서 새우젓이나 된장 조금 얹어 먹는 거예요. 단순한 조합 같지만, 요리사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입체적인 맛이에요. 밥을 씹으면 전분이 당으로 변하면서 은근한 단맛이 올라오고, 거기에 새우젓의 감칠맛과 짠맛이 더해지죠. 보리차의 곡물 향이 이 맛들을 부드럽게 감싸주고요. 들기름을 살짝 얹으면 향이 더 깊어져요.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밥상인데, 입안에선 정말 복합적인 맛의 폭발이 일어나요. 또 하나 좋아하는 건, 여름 채소들이에요. 호박잎이나 배추, 양배추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된장에 찍어 먹어요. 여름에는 찐 채소에 밥 한 술 얹어 먹으면 딱이에요.
셰프로서 계속 지켜나가고 싶은 한식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식의 고유성, 그 자체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엔 퓨전 음식도 많고 새로운 시도도 끊이지 않지만, 결국 한식의 핵심은 발효 음식이에요. 젓갈, 된장, 식초 같은 것들이죠. 감식초만 해도 오랜 시간 발효시켜야 맛이 완성되잖아요. 그렇게 시간이 만든 맛이 한식의 정체성이죠. 예를 들어 솥밥 위에 불닭마요를 올려 먹지는 않잖아요. 젓갈이나 들기름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우리의 몸과 입이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괜히 무언가 더하려 하지 않고 본래의 맛을 어떻게 더 잘 살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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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한별
Photographer 박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