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말맛 따라 멋 따라


한국살이 20년 차, 영국인 번역가이자 방송인 폴 카버가 말하는 한국어의 맛과 멋.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한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던가.

영국인 번역가 폴 카버는 열여섯 살 때 여행 온 한국에 마음을 빼앗겼다.

결국 다시 돌아와 회계사로 일하다 서울시청 글로벌운영팀장을 거쳐 지금은 번역가이자 방송인, FC서울의 골수 팬으로서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20년 가까이 한국어로 일하고 소통하며 살아온 그는 이제 한국이라는 언어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제2의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중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경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1992년, 가족 여행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친구 집에 들를 기회가 있었어요. 아무래도 대사관 직원들은 좋은 동네, 멋진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보니 첫인상이 무척 좋았죠. 마침 대학교에서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어릴 때부터 불어, 일본어 등 여러 언어를 접해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언어 관련 전공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로 상담을 받아보니 영국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학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중국어를 전공하게 됐어요. 1년간 베이징에서 어학연수를 마친 뒤 여름방학 동안 다시 한국에 와서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태권도, 국토 대장정 같은 여러 활동을 경험했어요. 중국에서의 학업을 마무리해야 했지만 이미 마음은 한국에 가 있었죠.(웃음) 결국 2000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거의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석사 졸업 후에도 한국에 남고 싶었지만 당시 외국인으로서 취업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글로벌 회계법인에 다녔고, 다행히 바라던 대로 한국 지점으로 파견을 나올 수 있었죠. 이후 7년 정도 근무하다가 좋은 기회로 서울시청에 입사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지원 서비스를 담당하는 글로벌운영팀장으로 일했어요.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한국에 터를 잡게 되면서 어학당을 다녔지만 일상 대화는 가능해도 긴 대화나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엔 언어 실력이 부족한 상태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죠. 초반 6개월은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소통이 잘 안 되니까요. 다행히 회계 업무는 반복적인 부분이 많아서 온종일 한국어를 듣다 보니 점차 익숙해졌어요. 서울시청에서는 공무원 용어를 익히느라 고생깨나 했고요. 


한국어 공부는 주로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사실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 한국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달까요. 마치 어린아이가 말을 익히듯 주변의 말을 흡수한 거죠. 그런데 요즘은 번역 일을 주로 하다 보니 점점 말하기 실력이 퇴화하고 있다는 걸 실감해요.(웃음) 


한국어의 독특한 언어적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개인적으로는 존댓말이 정말 어렵더라고요. 어떤 관계에서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끝까지 유지해야 하니까요. 영어에는 그런 구분이 없어서인지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에서도 계속 예의를 갖춰야 할 때는 솔직히 좀 불편했어요. 특히 요즘 유튜브에서 블랙박스 리뷰 영상을 자주 보는데, 명백한 음주 운전자에게도 “술 드셨네요”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모습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져요.


번역 과정에서 ‘이건 정말 영어로 옮기기 어렵다’고 느낀 표현이 있었나요? 

‘아이구’요. 보통 영어로는 ‘Gosh’나 ‘Oh my goodness’ 정도로 번역되는데, 영어권에서는 이런 표현이 다소 촌스럽게 들려요. 실제로는 욕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죠.(웃음) 한국에선 정감 있는 표현이지만, 영어로는 그 말맛을 제대로 살리기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방송 자막에 욕을 넣는 건 대부분 금지라 표현을 순화해야 할 때도 많고요. 영어에선 욕이 더 일상적으로 쓰이다 보니 한국어 표현이 욕은 아니더라도 오히려 거친 어조로 옮겨야 더 자연스럽게 들릴 때도 있거든요. 


오늘 촬영하면서 포스트잇에 적어둔 것처럼 여전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도 있다고요?

‘새삼스레’ 같은 단어는 아직도 정확히 감을 못 잡겠어요. 사전에는 ‘Anew’나 ‘Afresh’라고 돼 있는데, 실제 쓰임과는 좀 다른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번역할 때도 매번 문맥에 따라 다르게 옮기는 편이에요. 글을 쓸 때도 그렇잖아요. 어떤 단어는 외워서 자연스럽게 활용하게 되지만, 어떤 단어는 자주 봐도 매번 사전을 찾게 되는 것처럼요. 저한테 ‘새삼스레’가 딱 그런 단어예요. 한국어와 영어는 구조나 문화적 맥락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의 균형은 어떻게 잡나요? 기본적으로는 직역이 우선해요. 다만 작품의 분위기나 작가의 스타일에 따라 의역이 더 자연스러울 때도 있어요. 다양한 작품을 번역하면서 느낀 점은, 작가와 잘 맞으면 의역도 좀 더 과감하게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최대한 단순하게, 직역 위주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맡는 번역 작업은 대부분 해외 투자를 위한 파일럿 번역인 경우가 많아요. 짧은 분량이지만 그 작품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작업하고 있어요.


자신만의 번역 철학이 있다면요?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영화 자막은 한 줄에 42자, 두 줄로 총 84자를 넘지 않아야 하잖아요. 저는 그 제한 안에서 최대한 원작자의 의도를 담으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한국 문화의 뉘앙스를 살리고, 보는 이가 읽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번역은 밸런스 게임인 것 같아요. 


다른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워보라’고 권한다면 어떤 이유를 들고 싶은가요? 

저는 한국어가 기초만 알면 꽤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생각해요. 물론 완벽하게 마스터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일상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비교적 빨리 가능하다고 느껴요. 우선 한글은 굉장히 과학적인 문자라서 읽는 건 금방 익힐 수 있고, 발음도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에요. 영어에서 온 외래어가 많아서 영어권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단어도 많을 테고요. 많은 한국 사람이 기본적인 표현만으로도 전달하려는 의미를 이해하는 편이라 의사소통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한국어 자체가 워낙 쿨하잖아요. 예전과 달리,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와, 멋있다!”는 반응을 받는 시대니까요 .


한국어 번역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요? 

몇 년 전에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을 예로 들면, 물론 작품   자체도 훌륭하지만 영어 자막 번역이 큰 영향을 줬다고 봐요. 심사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어 자막을 보고 평가하니까요. 만약 번역이 엉망이었다면 아무리 연출이나 연기가 뛰어나도 상을 받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도 마찬가지죠. 그런 걸 보면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느끼게 돼요. 저는 지금 주로 드라마 1~2화를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작품의 해외 투자를 위한 아주 중요한 시점이라 늘 부담을 갖고 임해요. 아직 누군가가 “당신의 번역 덕분에 이 작품이 해외에 소개되고 제작까지 이어졌어요”라고 말해준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좀 웃긴 얘기지만, 요즘 한국어가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잖아요. 그래서 외국인 한국어 화자가 많아질수록 번역가로서의 경쟁도 더 치열해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번역가도 많아질 테니까요.(웃음)


한글은 굉장히 과학적인 문자라서 읽는 건 금방 익힐 수 있고, 발음도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에요. 

무엇보다 요즘 한국어 자체가 워낙 쿨하잖아요. 예전과 달리,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와, 멋있다!”는 반응을 받는 시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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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손지수

 Photographer 박나희